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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게 오리지널] 그라운드 위의 태양 1

1


햇볕이 내리쬐는 운동장 위, 훈련이 끝난 축구부원들이 웃으며 흩어졌다. 2학년 주장이자 스트라이커인 강현우는 땀에 젖은 유니폼을 대충 걷어 올리며 물을 들이켰다. 구릿빛 피부 위로 또렷한 복근이 드러났다.


그때, 운동장 옆 벤치에서 책을 읽고 있는 윤서준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피부에 날렵한 실루엣,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책장을 조용히 넘겼다. 늘 조용한 그였다. 쉬는 시간에도, 급식 시간에도 책만 읽었다.


“또 책이야?”

현우가 장난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서준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응.”

“뭐 읽는데?”

“『데미안』.”

“맨날 어려운 것만 읽어.”


현우는 벤치에 걸터앉았다. 서준은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현우는 그런 서준을 계속 바라봤다.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축구부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신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넌 왜 축구 안 좋아해?”

“그냥… 시끄러워.”

“그럼 난 시끄러워?”

“응.”


서준은 담담하게 대답하고 다시 책에 집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우는 그 말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알고 싶어졌다. 조용한 서준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왜 책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그날 이후, 현우는 쉬는 시간마다 서준에게 다가갔다. 대화는 많지 않았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내렸다. 운동을 할 수 없게 된 현우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늘 같은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는 서준을 발견했다.


“비 오니까 여기 있는 거야?”

서준이 고개를 들었다. 현우는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서준 옆자리에 앉았다.


“비 오면 축구 못 하잖아.”

“그래서 심심해서 왔어?”

“아니, 너 보러 왔지.”


서준이 멈칫했다. 책장을 넘기던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현우는 그런 서준을 보고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 비가 오는 날이면 둘은 언제나 도서관에서 함께했다. 축구부의 태양 같은 현우와 책만 읽는 조용한 서준. 정반대의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2


비 오는 날의 도서관은 조용했다. 빗소리가 창을 두드리는 가운데, 책을 읽는 윤서준의 손끝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 옆에서 강현우는 턱을 괴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집중 안 되지?”


서준이 눈을 들었다. 현우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책장을 툭 건드렸다.


“너 때문에?”

“어. 나 때문에.”


서준은 한숨을 쉬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운동장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낯설고도 선명한 감각이 가슴을 두드렸다.


“너, 원래 이렇게 집요해?”

“응.”

“왜?”

“네가 궁금하니까.”


현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하지만 서준의 마음은 요동쳤다.


그때, 갑자기 현우가 몸을 기울였다. 서준의 어깨에 턱을 기대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얼굴 붉어졌어.”


서준은 얼른 얼굴을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현우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장난치지 마.”

“장난 아닌데?”


서준은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가슴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간다.”

“같이 가자.”


현우는 태연하게 따라 나섰다. 서준은 뭔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괜히 입을 열면 감정이 새어 나올 것 같아서.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학교 복도를 걸었다. 서준은 옆에서 걸어오는 현우를 힐끔 바라봤다.


‘넌 왜 이렇게 쉽게 나를 흔들어?’


하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현우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서준은 그런 현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둘의 거리는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3


비가 그친 뒤, 하늘은 맑게 갰다. 축구부 훈련이 다시 시작됐고, 강현우는 운동장 위에서 공을 몰았다. 늘 그렇듯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빠른 스피드, 정확한 패스, 그리고 압도적인 슈팅. 그라운드 위에서 그는 누구보다 빛났다.


윤서준은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쉬는 시간마다 운동장을 바라보는 게 습관이 됐다.


‘진짜 태양 같아.’


현우는 늘 강하고, 자신감 넘치고, 모든 걸 쉽게 해내는 사람 같았다. 그 반짝이는 모습이 서준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훈련이 끝나고, 땀에 젖은 현우가 서준에게 다가왔다.


“봤어?”

“…어.”

“어땠어?”


서준은 대답을 망설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현우는 그런 서준을 보고 슬쩍 웃더니, 갑자기 그의 손을 잡았다.


“가자.”

“…어디?”

“편의점.”


거부할 틈도 없이 현우는 서준의 손을 잡아끌었다. 손바닥이 뜨겁게 느껴졌다.


편의점에 도착하자마자 현우는 시원한 이온음료를 집어 들고 서준에게 하나 건넸다.


“이거 마시면 나처럼 축구 잘할 수도 있어.”

“흥미 없어.”

“너 진짜 축구 관심 1도 없냐?”

“응.”


현우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넌 뭐 좋아해?”

“…책.”

“그건 나도 알아. 말고, 사람.”


서준은 잠시 멈칫했다.


“좋아하는 사람 있냐고.”


갑자기 던져진 질문에 서준은 어쩔 줄 몰랐다. 그러다 조용히 이온음료를 빨며 시선을 돌렸다.


“…있어.”


현우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하지만 이내 평소처럼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오, 누구야? 우리 반?”

“비밀.”


서준은 자리를 피하듯 편의점을 나섰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현우는 그런 서준을 가만히 바라봤다.


‘설마…?’


태양 같던 강현우가 처음으로 확신이 서지 않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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